글_이수영/ 사진_공감만세
다른 여자 아이들에 비해서 나는 게임과 게임 방송을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게임과 다르게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한번 살 때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는 것이 내 죄우명이었다. 또한 이 여행의 목표이기도 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생각이었다.
처음에 나꽈우끼우 마을에 도착했을 땐 ‘사와디카~’만 수십 번을 반복했다. 그 때는 내가 해야할 태국인사를 다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선생님이 계속해서 웃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셔서 무표정한 아이들에게도 웃음을 지어야 해서 조금 싫었다. 웃음을 계속 지으며 인사를 하니 안면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고 해야할까? 아이들이 공연을 보여줄 때도 그냥 모든 게 새로웠고 신기했다. 조금씩 태국어가 들린 때는 ‘이제 저걸 며칠동안 들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긴장도 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가 태어난 바로 후에는 아기 때라서 기억도 나지 않고 그 때의 기분과 심정 또한 알지 못할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가본 외국 여행이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한국과는 다르게 비행기에서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습한 공기, 알아들을 수없는 단어, 적응도 되지 않는 음식들, 벌레들, 사람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공항은 태어나기 위한 과정이었고, 마을의 도착을 알리는 사람들의 환영소리는 태어나서 기뻐하는 간호사와 의사들 같았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웃음을 지으며 아기를 다루듯이 조심히, 그리고 친절하게 나를 대했다.
가장 떨렸을 때는 홈스테이 부모님을 정할 때였다. 내 홈스테이 친구 시현이와 부모님을 모두 살펴보던 중이었다. 그 때 그 중 한 분과 눈을 딱 마주치고서 서로 미소를 주고 받았는데, 우연인지 그 분이 바로 내 홈스테이 엄마가 되셨다! 너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후에 ‘이제 새엄마가 생긴건가?’ 라는 묘한 기분으로 홈스테이 집으로 갔다. 아빠와 엄마께선 정말 너무나도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사실 태국의 흰 쌀밥이 입이 맞지 않아서 조금씩 먹고 반찬을 주로 먹었었다. 하지만 집밥이 최고라더니 정말 우리 홈스테이 집밥은 입에도 잘 맞고 정말 맛있었다.
우리집 바로 앞집은 태국어와 영어가 모두 사용될 수 있는 집이여서 가끔 앞집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태국어를 영어로 통역해주셨다. 그땐 7시까지 마을의 작은 학교에 가서 하루 일과를 정리하거나 선생님들과 할 것이 있었다. 그런데 6시 50분에 엄마께서 요리를 하고 계신 게 아닌가! 빨리 가야한다는 조급함에 나는 시현이와 앞집에 가서 ‘저희 7시까지 학교에 가야하는데 지금 엄마께서 요리를 하고계세요. 빨리 가야 한다고 좀 전해주세요’ 라는 식으로 아주머니께 영어로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또 아주머니께선 ‘여기서 밥을 먹고 가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어쩔 줄 모르고 일단 앞집에 홈스테이를 하고있는 태영이와 언니를 따라서 밥을 그릇에 덜고 있는 중이었다. 밥을 덜고 뒤를 돌아보니 엄마께서 집에서 밥을 먹자고 데리러 오셔서 시현이와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서 한국말로 ‘어떡하지’만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결국 시현이와 나는 앞집에서 밥을 먹게 되었지만…. 엄마께선 우리를 계속 보시면서 더불어 많이 먹으라고 집에서 반찬까지 가지고 오셔서 우리를 보셨다. 결국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마음 한 쪽을 시릴 듯이 찔려하면서 밥을 입에 넣었다. 그래도 그 다음부턴 아무리 늦어도 집에서 밥을 먹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다음 또 기억나는 것은 ‘한국어 교실’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아무리 많은 분들께 가르침을 받아왔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무섭다. 무섭기보단 잘못 가르치거나 이상하게 가르치고 재미없게 가르치게 될까봐 불안했다. 특히 한국어 교실을 할 때 심했다. 시현이가 웃으면서 태국어를 섞어가며 여자아이를 가르칠 땐 나도 모르게 불안해졌다. 하지만 나도 유치원 샘이 된 기분이라서 아무 생각없이 나도 한국어를 따라하게 되었다. 마지막에 가장 울컥했던 일 네 가지가 있었다.
마을에서 떠나기 하루전에 서로 한마디씩 홈스테이를 했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명이 울기 시작하니 어찌나 울음을 참기가 힘들던지…. 특히 아빠께서 계단에서 구른적이 있으셔서 고소공포증이 있었는데 우리가 홈스테이를 한다는 것 하나로 10년만에 처음으로 2층으로 올라오셨다고 하신다. 그 땐 정말 눈물을 참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 다음은 2층에서 시현이와 태국어로 ‘감사합니다. 아빠, 엄마, 다음에 또 뵐게요’를 악필로(?) 쓰고서 아빠게 드릴 때는 글씨를 쓰면서 울컥했다. 그 후 이 편지를 드리면서 시현이와 내가 따로따로 용돈이 든 편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그 편지를 시현이와 돌아다니다가 시현이가 잘못하고 그 편지를 잃어 버렸을 때 난 정말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눈이 팬더가 돼서 날 보고 아이들이 웃을정도 였으니, 그 양은 엄청났을 것이다.
먼저 이 마을에 온 후에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얻었다. 새로운 가족도 얻었지만 먼저 마을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졌다. 마을은 그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이고 도시와 별다른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달랐다. 앞집도 옆집도 이 마을 전부가 모두 가족이었다. 서로 서로 집의 대문은 거의 다 열려 있었고 인사를 하면 모두 웃으며 같이 인사해주었다. 느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웃’의 개념이 아닌 모두 ‘가족’의 개념으로 살아가는 듯했다.
또, 대화하는 법을 다시 깨달았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대부분 말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말이 안 통하니 말 하나하나를 모두 몸으로 표현했고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했다. 이제서야 진정한 대화라는 걸 깨달은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정말 이 여행 하나로 많은 고정관념들이 깨지고 처음 보는 사람과 며칠 있었을 뿐인데 울어보고, 그만큼 느끼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많았던 것 같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과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짜 내가 태국이라는 곳에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마을에서 나오면서 딱 든 생각은 하나였다. ‘아, 진짜 제발! 다시 오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