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안수빈/ 사진_공감만세
강원도 삼척 출신 남자애를 낚고 겨우 한 숨 돌렸던 공항에서의 하루, 그리고 호텔에서의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나는 고슴도치처럼 경계의 털을 빳빳하게 세운 채였다. 필리핀에서 ‘나대는 애’로 찍혔던 기억, 오랜 중 2 기간 동안 왕따로 지내며, 나는 사실 ‘이번에도 그러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으로 조금 떨고 있었던 것 같다.
일탈하고 싶었다. 내가 정상적인 인간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늘 지구환경, 비전력, 올바른 삶에 대해 게걸스럽게 읽고 생각에 빠져사는 내가 진짜 미친 몽상가인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체에너지 센터가 있어서 내가 장래 하고 싶은 일과 연관되니까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고 왔다. 내가 그런 꿈을 가지겠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고 푸딩마냥 흔들리고 있던 나를 벗어던지고 싶어서 숨을 좀 쉬려고 온 여행이었다. 정작 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는 그냥 비행기 삯이 비싼 나라정도가 내가 아는 것의 전부였지만 피곤한 호텔에서의 밤 이후 진한 자스민 꽃 목걸이의 향기에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 뒤 숨가쁜 여행이 마파람에 스쳐지나갔다.
대체에너지 센터, 절의 코끼리와 닭 이야기, 친절했던 목공예 가게 아저씨의 웃음, 맥주모자 건진 야시장까지 경험마다 소소한 에피소드와 새로움이 조금씩 잊고 있던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2학년 5반 유령 안수빈이 아니라 웃고 떠들기 좋아하는 진짜 안수빈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감은 마을에서 절정에 달했다. 한번도 낯선 사람 앞에서 무엇을 한 적이 없던 내가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화끈하게 춤을 추면서부터 내 마인드 파괴가 시작되었다.
영어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 ‘헉!’하고 있던 나에게 북극곰이 한 말. 몰론 모두에게 했지만 내겐 굉장히 강렬했다. “내가 왜 이런걸 시키는 것 같아? 말도 안 되는데 가계도를 그려오라 그러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서 왜 지내게 하겠어? 말은 도구일 뿐이야.” 대충 그런 말이었는데 난 그게 계속 곱씹혔다. 그리고 3일째,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난 언제나 왜 모든 걸 말로만 해결하려 했을까? 왜 누군가의 말에 상처 받고 말 한마디로 오해하고 불신하고... 가장 원초적이었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태국어를 몰라 더듬거리는 3살짜리 아기 매와 야이, 따, 잠보에게 사랑 받으면서 생각했다. 우리 엄마, 아빠가 정말 이랬구나.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살았던 거구나. 말이 다가 아니다. 마음과 몸짓, 눈빛 하나에서부터 알 수 있는 그 어떤 게 있다는 걸 정말 처음인 것처럼 깨달았다. 내가 삶을 살면서 이처럼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장녀로써, 학생으로서 눈치 보고 늘 인정 받기 위해 안달복달하며 말하고 행동했다. 여기서 매, 야이, 따, 잠보는 나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늘 노심초사 무언가를 해주려 했다. 그게 우리 엄마, 아빠가 나에게 보여줬던 것인데 한심하게 모르고, 나 혼자 뿐이라고 그렇게 닫혀만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아깝고 너무 미안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산다. 산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대화의 연속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교감, 소통의 본질을 형용할 순 없지만 깨달았다.
이게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가장 필요한 한가지였던 것 같다. 나는 나다. 사람관계는 그냥 사람관계다. 잘 해야할 필요도 꼭 정답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주도적 삶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래서 내게는 마을살이가 그렇게 고맙고 눈물나게 행복했었나 보다. 나의 이분법적 사고, 이론 단정적 사고의 문제점, 인간이 행동하는 이유, 합이라는 건 무엇이냐 등등.. 지식적으로 얻은 것도 많지만 마을 살이에서 내가 정말 잘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한건 홈스테이를 하면서 얻은 사람 관계의 참뜻인 것 같다.
함께 하면 행복하다. 함께 하면 어렵지 않다. 몰론 개성이 파괴 될 수도 갈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조율하는 것은 자신의 몫. 내가 제대로 꾸밈없는 나로써 ‘같이’하는 그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을 잘 해낸다면 언제나 싸바이 싸바이 미쾀쑥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단조로운 일상이 깜찍하게 느껴질 때, 이 곳에서 삼정의 파란을 시원하게 느껴볼 수 있어서 너무 고맙고 기쁘다.
북극곰이 소리 한번 지르면 느끼는 뻘쭘함, 아이들이랑 이야기 할 때 느끼는 안도감, 현지인과 소통 할 때의 기쁨, 잠들기 전의 설렘, 태국 땍땍이들과 놀 때의 화끈한 즐거움, 락의 나긋한 목소리에 착해지는 기분, 마치아의 선물에 은은한 우정, 피잠보를 볼 때마다 두근거림, 웃는 아줌마들을 보면 이는 푸근함, “여기 있어, 나랑 같이 살자”하는 야이의 검버섯 돋은 얼굴에 미안하고 고맙고 아프면서 기쁜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 따에게 받은 귀여움... 한꺼번에 밀려들었던 내 감정들 하나하나가 나에겐 가장 큰 공부였던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움츠러들었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내게 “괜찮아, 수빈아.”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용기를 냈다. 역시 난 이기적이다. 나 혼자 느낀 것만 잔뜩 썼다. 마을이, 태국이, 그런 거 다 빼고 내가 이랬다, 저랬다 밖에 써지는 게 없다. 그래도 좋다. ‘나꽈우끼우 여행학교’는 그저 바라만 보아도 흐뭇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