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지재혁/ 사진_공감만세
필리핀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을 때 저는 생각이 정말 많았습니다. 부모님을 떠나 하는 첫 번째 해외여행 인데다가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섯 살에 처음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저는 한 번도 쉰 적 없이 수련을 했고, 시합에서 두각을 보여 태권도를 전문으로 배우는 중학교로 진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숨 쉴 틈 없는 단체생활과 반복되는 힘든 훈련, 그리고 연속되는 시합에서의 실패는 저의 자신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저는 결국 몸과 마음에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어렵게 일반 중학교로 전학을 하자마자 부모님의 권유로 떠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여행의 설렘과 함께 돌아와서 해내야 할 새 생활에 대한 걱정과 기대로 많은 생각을 하며 떠났습니다.
밤에 메트로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상점마다 군데군데 불빛도 켜져 있고 우리나라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 했는데 아시안 브릿지에서 쉬고 아침에 밖을 보니 필리핀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필리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인트라무로스는 스페인에게 400년 동안 지배를 받으며 생겨난 유럽식 거리였고, 산티아고 요새는 스페인, 일본, 미국에게 500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았던 흔적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필리핀 사람들이 정말로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에게 35년 동안 지배를 받으며 고통 받았다고 배웠는데 500년 동안 식민지의 아픔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정여행의 원칙에 따라 현지의 대중 교통수단인 심야버스를 타고 9시간 동안 힘들게 이동한 것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멋지게 치장한 필리핀 교통수단인 지프니를 타 본 것도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 이었습니다. 필리핀 전통 가옥에서 잠을 자는 것도 필리핀 음식을 현지인이 만들어 주는 대로 먹어보는 일도 공정여행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필리핀 스타일 인가 봅니다. 아주 맛이 있었거든요.
키앙안에서 한 시간을 험한 산길로 지푸니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지푸니를 타고 새들에서 비를 맞고 배낭을 메고 오솔길을 걸어 바타드 사이먼 산장에 도착했을 때 집에서 필리핀에 대해 알아보며 사진으로 보았던 계단식 논이 보였습니다. 사진과는 다른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라기도 했고, 초록색 논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가 없었습니다. 가파른 계곡마다 10m 이상의 높이가 되는 돌담을 쌓았고 사람의 힘으로만 만들어한 단을 쌓는데 30년 이상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푸가오족 사람들이 정말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그런 계단식 논이 무분별한 개발과 이푸가오족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는 설명을 듣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땀을 흘리며 열심히 돌을 나르고 복원 작업에 참여 했습니다. 우리가 복원활동에 참여한다고는 했지만 현지주민들에게 오히려 일거리를 만들어 드리고 온건 아닌지 오히려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의 일정 중에 바타드 초등학교 방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소개 해 주고 싶어서 도복을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격파를 위해 준비한 송판을 가는 도중에 아쉽게도 잃어버려서 송판 대신 풍선에 대고 멋진 발차기를 날려야 했지만, 아이들은 모두 박수를 쳐 주었고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이 많아서 기본동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설프면서도 진지하게 제법 잘 따라하는 아이들을 보자 마치 제가 태권도 사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자신감이 가슴속에서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영어가 자신이 없어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었지만,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저를 “my son" 이라고 부르는 산장지기 사이먼 아저씨에게 ”my father" 라고 대답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되지도 않는 영어를 생각나는 대로 말 할 정도로 자신감도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만들 때 많이 도와주었던 마젤란도 잊을 수 없는 필리피노입니다. 자기가 미남이라고 우겨서 웃기기도 했지만요.
부모님 덕분에 떠났던 이번 공정여행은 제게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필리핀의 슬픈 역사뿐만 아니라, 진짜 필리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고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직접 느끼도록 해 주었습니다. 호텔이나 관광지에서 만나는 틀에 박힌 친절함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면서 만이 느낄 수 있는 우리 가족 같은 느낌입니다. 바나우에 수공예품 거리에서 이푸가오족이 만들고 우리가 구입한 공예품의 수익금은 이푸가오족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데 쓰인다고 합니다. 오랜 식민지 시대를 지나 비록 지금은 가난하고 힘든 나라이지만 내가 태권도를 가르쳐 주었던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필리핀을 부자나라로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옛날 우리나라에게 필리핀이 장충체육관도 지어주고, 벼농사 기술도 보급했던 부강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필리핀 친구들도 큰 꿈을 갖고 열심히 노력해서 필리핀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옛날 우리나라를 도와줬던 그 명성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열심히 태권도를 배우던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나도 열심히 새로운 학교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