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소연/ 사진_공감만세
필리핀 하면 떠오르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난? 영어? 필리핀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멀기만 한 ‘먼 나라 이웃나라’라는 타이틀이 딱 알맞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 또한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필리핀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제 여행은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한편의 무관심으로 시작되었어요.
여행은 마닐라에서 필리핀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되어 계단식 논 세 군데를 둘러보고 빈민지역을 방문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어요. 필리핀의 천주교는 토속신앙과 결합된 조금은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더군요. 그래서인지 분위기 뿐 아니라 성당에 있던 예수 상들의 모습까지 우리나라와는 다른 조금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어요.
무분별한 산업화는 2000년이 넘게 유지되어온 계단식 논도 절대 비껴가지 않았어요. 우리는 키양안에서 SITMo 라는 자원봉사 단체의 복원을 도우며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해보고자 하였지요. 그들과 함께 동거 동락하는 며칠 동안 비록 우리가 도와준 것은 논 두 개에 삔꼴을 만드는 단순한 일이였지만, 이러한 움직임들이 점차 증가하고,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사라져가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재조명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바나우에 논 한가운데 생긴 민박집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 민박집을 건설함으로 인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계단식 논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멋지기에 그 민박집을 선택한 것일 거예요. 며칠 전에 공정무역에 관한 수기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 수기에서는 흑인들이 금장신구를 착용하지 못한다는, 아니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금이 비싸기도 하겠지만 흑인들은 그 장신구 하나 만들기 위해 자신의 친구, 그리고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해요. 실제로 세계적인 휴양지 주변 직역은 대부분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고 해요. 바로 옆의 골프장, 리조트에서는 물이 콸콸콸 쏟아져 나오는 반면 바로 옆의 민가에선 집안의 수도는 고사하고, 공동수도까지 자물쇠로 잠가두고 일정 시간에만 풀어준다고 하니까요. 자신의 여행, 그 달콤한 며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자연이 고통 받는지 아는 사람이 과연 여행을 마음 편히 할 수 있을까요?
바나우에의 거대한 계단식논 사이사이 박혀있는 집들은 아름다운 동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냈어요. 산골마을인 키양안과 달리 굉장히 발전한 바나우에는 필리핀 주화 중 가장 큰 단위인 1000페소 지폐의 뒷면에 그려질 만큼 유명하여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렸어요. 하지만 그곳의 계단식 논은 키양안보다 훨씬 많이 파괴되어 있었어요.
자신의 조상들의 터전, 그리고 자신들의 뿌리를 지키려고 한 바이니난 마을 사람들과 조상들이 일구어 놓은 계단식 논을 이용해 관광업에 종사하기로 한 바나우에 사람들 중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하는 것을 제가 판단할 수는 없지요. 어떻게 됐든 지금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에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먼 훗날 제가 이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어떻게 변해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씁쓸하더라고요. 그들이 지금처럼 관광업에만 종사하게 된다면 이곳의 계단식 논은 언젠가 없어질 테고, 그럼 결국 그들은 이곳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바타드에서 양철로 지어진 교회를 보면서 아무리 깊은 산골이라도 시대가 변하면서 변하되고 있다는 게 굉장히 서글프게 다가왔어요. 항상 무언가는 새로 생기고, 또 동시에 사라진다는 단순하고 당연한 그 사실이 말이에요. 우리가 복원한 논도 SITMo와 사이먼 아저씨에겐 그들의 전부일 정도로 소중한 것이고, 우리고 타고 이동한 지프니, 트라이시클도 운전자들에겐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소중한 것들일 거예요. 바타드에서 축제 때 주술을 걸던 뭄바키 할아버지는 현재 유일하게 축제를 진행할 수 있는 뭄바키라고 해요. 하지만 그 할아버지 역시 연세가 많아 힘들게 주술을 하시는 걸 보고 굉장히 가슴이 찡 하더라고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진 않나 싶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아무리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이 많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해도, 솔직히 아직은 무엇을 지켜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 막막하기만 한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사라져가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마닐라에서 질리도록 본 것 중 하나는 벽이에요. 사람들 사이에 높다란 벽을 만들어, 일방적으로 서로의 왕래를 차단시키는 그런 현상을 마닐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어요. 부유한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벽을 쌓아 가난한 사람들과 차별화된 자신들만의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정해진 문을 통해 정해진 사람들만 통과할 수 있도록 했죠. 게이티드 커뮤니티, 즉 벽의 안쪽의 사람들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벽 바깥쪽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굉장히 고되게 보내고 있었어요.
우리가 방문한 바세코 역시 그런 모습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지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곳의 아이들은 빈민가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예쁘고 따뜻한 웃음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어요.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께서 ‘우리와 바세코 아이들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셨어요.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이들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하셨지요. 부유한 나라인 한국에서 태어나, 부유한 부모님을 만나 조금 더 편안하고 부유한 환경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내가 그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들은 지금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에요.
바세코는 현대사회에서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정, 그 정을 다시 느껴 볼 수 있었던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들처럼 살지도 못할 거예요.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귀여운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필리핀의 빈부격차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면 게이티드 커뮤니티와 같은 극단적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개인의 재력이 최우선이 되고, 재력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필리핀의 사회적 풍조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외모, 학벌, 재력 등으로 개인을 평가하고 서로 이해타산적인 관계에서 만나고자하는 우리가 그들을 나쁘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 걸까요?
우리의 여행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조지, 밀라 할머니, 부간 등등. 지금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내 여행을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행복한 것 같아요. 그들을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또한 그 나름대로의 행복이고요. 누군가 공정여행은 여행을 하면서 만난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다시 가게 되는, 그런 여행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벌써부터 그들이 그리워지고 있거든요.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어요.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꿈을 말이에요. 지구에서 살아가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껴봤거든요. 제가 본 것은 ‘바세코’라는 지역의 단편적인 겉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이 얼마나 힘든 상황 속에서 많은 어려움과 슬픔을 감내하고 살아가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도 이번 여행은 제게 소중하기만 한 기억이에요. 즐거운 불편함, 공정여행. 그 여행은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끝을 맺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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