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아트센터
건조한 도시에 촉촉한 단비를 내리다
일본 교토시에 있는 ‘교토아트센터’는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다. 폐교 활용 방안 예로, 창작 공간이나 문화 복지 시설이라는 측면에서, 근대 건축 보존 사례로도 바라볼 수 있다. 각기 다른 시각처럼 보이지만 관통하는 개념은 유사하다. 문화 부문에서 <공간과 사람>이 어떻게 얽히는가의 문제다. 무척 포괄적이고 졸가리를 잡기 쉽지 않은 이 개념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해낼 수 있는지 보여준 좋은 사례다.
학교, 문 닫다
1931년 일본, 교토 중심부에 한 소학교가 있었다. 당시 이 동네는 기모노를 만들어 파는 곳이 많았다. 기모노는 비싼 물건이었고 종사자들 생활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공립학교이긴 했지만 좋은 학교를 만들고 싶은 주민 기부가 이어졌다. 학교를 만드는데 더 공을 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교토아트센터 세련된 건물 외관과 내부 공간 구석구석에서 이런 정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전통식 방이다. 우리가 흔히 다다미방[和室]이라고 부르는 방을 교실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일반적이지는 않은 경우란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을 들인 ‘메이린(明倫)소학교’도 흐르는 시간과 변화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영업과 주거가 복합적이었던 주변 환경이 사무와 영업공간으로 바뀌고 경쟁력 있는 새로운 학교가 생기면서 메이린소학교에 입학할 아이가 크게 줄었다. 1993년 결국 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200년 메이린소학교는 교토아트센터로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 교토아트센터 주변은 무척 현대적이다. 높은 빌딩이 즐비하고 널찍한 도로가 지난다. 8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킨 소학교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그곳에 메이린소학교는 80년 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소학교에서 아트센터로 쓰임을 달리하면서도 기존 공간에 손을 거의 대지 않았다. 나무로 만든 복도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정겹다. 소리에 반응을 보이니, 안내를 맡은 이시이(石井) 씨가 복도 바닥은 신경 쓰지 말라며 안심시킨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소리가 나는 게 아니에요. (웃음) 오래돼서 그래요. 제작실과 자료실 등 새로운 공간을 만들면서 기존 소학교 시설을 최대한 살려 내부 공사만 했어요. 바닥도 그 당시 그대로죠.”
안내하는 내내 이시이 씨는 이점을 강조했다.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났다.
7년 준비하다
소학교였던 이곳을 폐교하고 나서 갑자기 교토아트센터가 들어선 것은 아니다. 폐교시점은 1993년이지만 아트센터를 개관한 것은 2000년이다. 학교를 폐교한 이후 교토시는 예술문화 진흥 계획을 결정하면서 이곳을 예술의 장(場)으로 활용하기 위한 사전 단계를 먼저 거쳤다. 교토시 예술축전 전시장 중 한 곳으로 4년간 이용했고 예술가에게 아틀리에나 연습장으로 제작실을 제공하는 <아트 액션 교토>라는 사업을 진행했다. 시행 결과를 교토아트센터 검토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사업 결과를 검토하고 2000년 4월, 교토아트센터를 개관했다. 개관시점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 사이에 전시장과 스튜디오로 공간을 활용하면서 정책을 다듬고 계획을 구체화했다. 인상적이다.
현재 교토아트센터 운영은 재단법인인 교토시예술문화협회에서 맡고 있다. 민간위탁인 셈이다. 교토시에서는 관리비 명목으로 보조금을 지급한다. 지정 관리료(사업비, 관리비)는 매년 약 1억 2천7백만 엔(2009년 기준) 정도다. 이 돈으로 아르바이트를 포함해 20명 정도 되는 관리 인원 월급을 지급하고 시설을 관리하며 사업을 진행한다. 관리 인원과는 별도로 자원봉사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자원봉사 등록 인원은 대략 200명이다. 이들 모두가 매일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자원봉사는 ‘자율과 자발’이라는 기본 원칙을 토대로 적절한 설명회와 교육을 통해 배치하고 있다.
연간 이용객 수는 공식적으로 따져보지 않아 알 수 없으나 2009년 사업 참가자 수만 6만 3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교토아트센터가 2010년에 시행할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Artist-in-Residence, 일명 AIR> 공고를 내면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약 30개 예술가 그룹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으로 밝혔다. 분명한 것은 이용객을 정확하게 집계해 그 결과로 사업성과를 가늠하는 시스템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기자기하다
폐교한 메이린소학교에 총 열두 개 제작실과 갤러리 두 곳, 식당 겸 카페, 도서실, 자료실, 담화실 등을 집어넣었다. 별도의 숙박시설은 없다.
1학년 1반 새싹들이 공부했을 것 같은 1층 교실은 카페로 운영하고 있는데 교실 밖 복도로 퍼진 커피 향이 묘하다. 식사도 할 수 있는 카페는 다시 민간에 위탁했다. 유명세를 타 꽤 많은 손님이 찾고 있단다. 카페 옆 교실은 정보실로 다양한 공연, 전시 소식을 담은 팸플릿과 포스터를 보기 좋게 정리해 놓았다. 들르면 즉각적으로 정보와 접한다. 웹상에 정보를 모아 제공하는 것과 비교할 때 아날로그적지만 감성이 살아 있는 소통방식이 흥미로웠다.
“교토와 오사카(칸사이 지역) 공연, 전시 소식을 주로 다루지만, 전국에서 보내오는 팸플릿도 진열해 놓고 있어요. 팸플릿은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고요.”
정보코너 옆 교실은 도서실이다.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지는 않았다. 문화, 예술 분야 서적과 비디오에 교토시, 메이린소학교에 관한 자료만을 모으고 관리한다. 대출할 수 있는 책이나 관람할 수 있는 자료 수만 해도 5천 점이 넘는다.
교실 하나를 통째로 개방해 놓은 2층 담화실(談話室)은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시락도 먹고 수다도 떨고 공부도 하는 열린 공간으로, 낡은 의자와 책상이 소학교 교실 모습 그대로 놓여 있다. (메이린 소학교 것은 아니다.)
교토아트센터 핵심 공간이랄 수 있는 제작실은 2층부터 4층까지 총 12개 실이다. 전체 공간에서 차지하는 면적도 가장 넓다. 연극과 무용, 미술 등 장르 구별 없이 누구나 신청과 심사 등 규정한 절차를 거쳐 사용할 수 있다. 연습 중인 젊은 예술인들이 있었지만, 이시이 씨는 현장 공개를 꺼렸다.
“스케줄에 맞춰 공간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간을 빼앗으면 자칫 전체 일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복도 쪽으로 난 창을 통해 몇 곳은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젊은 친구들이 모여 연극 연습이 한창이다. 이곳에서 연습하고 도쿄에 있는 소극장 무대에 작품을 올릴 계획이란다. 연습실을 마련하기 녹록치 않은 예술가 집단에 매우 유용한 공간인 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연과 전시 등이 교토아트센터에서 펼쳐지기도 한다. 각종 공연에 쓸 도구와 기자재를 보관하는 기구실을 별도로 갖춘 것도 그 때문이다. 최장 3개월을 빌려준다니, 연습실이 궁한 무대공연 팀은 물론이고 다양한 단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안성맞춤이다.
다만, 두 곳에 만든 전시공간은 교토아트센터 자제 기획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별도 대관은 하지 않는다.
세상과 소통하다
제작실로 사용하는 12개의 교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제작실은 도서관이나 정보코너 등 다른 시설과는 달리 시민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열린 공간은 아니다. 매년 3월, 9월 제작실 사용자 공고를 내, 젊은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아 3개월간 제작실을 무료로 빌려준다. 미술, 연극, 댄스 등 장르에 구분 없이 제작활동을 지원해 주고 있다.
“제작실 사용자는 3개월 안에 워크숍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해요. 워크숍은 제작실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가 강사가 되어 시민을 초청,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워크숍 참여자는 시민으로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 신청 받고요. 워크숍 내용은 예술가 마음대로 자유롭고 다양한 형식으로 진행하죠. 그 과정에 우리가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교토아트센터는 자국민에게만 한정된 공간이 아니다. 예술문화 교류 사업의 하나로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프로그램 (Artist In Residence Program, 이하 AIR)을 진행한다. 교토아트센터 AIR은 교토에서 예술적 창조성을 발현하고자 하는, 시각 예술, 퍼포밍 아트, 음악, 무용 등 예술관련 분야 젊은 작가와 연구가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AIR 프로그램에 국적은 상관없다. 매년 4월쯤에 서류를 심사하고 합격자는 다음해에 활동하도록 한다. 숙소는 교토아트센터 밖에 마련해 준다. 센터 자체에 별도로 숙박시설은 갖추지 않았다.
ㄷ자 형태의 교토아트센터 건물 사이에는 인조 잔디가 깔리지 않은 작은 운동장이 있다. 이 운동장도 시민을 위해 개방한다. 운동회를 열거나 게이트볼, 테니스 등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하는 데 주로 사용한다. 테니스를 하다가 잠시 쉬던 미나미 씨는 교토아트센터 역사부터 시작해서 관련 내용을 술술 풀어놓는다.
“매주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테니스를 하러 옵니다. 이곳은 스포츠나 연극을 즐길 수 있는 곳이죠. 학교에 학생이 없고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 마련인데 여기엔 아트센터가 들어섰습니다. 맨션(아파트)을 세워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어요.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하기 편리한 고마운 공간이죠.”
메이린소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아직도 그 졸업생들이 주변에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이 학교에 대해 갖는 자부심은 여전히 대단하단다. 이날 안내를 맡은 이시이 씨는 교토아트센터를 개관할 때부터 10년 동안 이곳에서 근무했다. 그녀 생각이 궁금했다.
“소학교 건물이 예술이라는 장르하고 잘 어울려요. 교실이 좀 특수한 공간이잖아요. 원형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이용하는데 살짝 불편한 부분도 있지요. 그래도 그런 점이 매력적이잖아요. 또 예술가뿐만 아니라 시민이 언제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아요.”
제작실 입주 창작자들이 진행하는 워크숍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 대부분이 무료다. 문턱이 없었다.
학교는 본래 문화공간이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학교는 교육기관인 동시에 한 지역사회의 문화공간이었다. 학습발표회나 운동회 등 학교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을 직접 제공하거나, 강당이나 운동장 등 공간을 활용하도록 내주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폐교를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대단한 변화가 아니다. 자연스럽다. 기능 중 하나가 소멸했을 뿐이다. 폐교가 아닌 다른 시설을 활용할 때보다 시민 친화력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토아트센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교토아트센터의 일부 공간에는 과거 메이린소학교 시절 사용했던 교구를 그대로 두었다. 이를 발견한 시민이 받는 감상이 어떨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 교토아트센터는 균형을 갖춘 상태에서 예술 창작자와 향유자의 자연스러운 소통을 매개하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이 부분이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창작과 향유는 뗄 수 없는 짝이지만 갈등 역시 무척 심하다. 이 과정에서 정책 기획자 개입이 과도하면 자칫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발생할 수 있는 이런 충격을 최소화하며 자연스럽게 관계를 유지하는 구실을 ‘공간’이 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대목이다.
제작실이 전체 공간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놓고 볼 때 자칫 전문 예술인을 고려한 공간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제작실은 정말 다양한 장르, 다양한 사람이 이용하고 있다. 연극과 무용, 밴드, 합창 등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용하는 이들은 프로 예술인일 수도 있고 아마추어 동아리거나 자체 연습공간을 마련하기 어려운 학생일 수도 있다. 여기에 국제적인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더한 형태다. 교토아트센터는 왕성한 창작행위가 일어나고 그 결과물을 공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소통과 매개는 그렇게 <공간>을 중심에 두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지금, 이런 <공간>을 갖고 있는가?
-월간 토마토 2010년 12월호 기획특집(4)_ 토마토, 바다 건너 문화를 만나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