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송송이
스페인 남부인 말라가로 입국해서 북쪽으로 올라가 포르투갈의 리스본과 포르투를 보고 스페인 북동부인 바르셀로나에서 출국하려던 처음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6개월 전에 끊어놓은 비행기 표의 인, 아웃을 이제 와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들린 듯한 클릭 신공을 발휘하며 아 코루냐에서 바르셀로나로 기차나 버스 이동을 알아봤지만 워낙 넓은 나라인 탓에 이동에 하루가 소요된다는 결과만 알게 되었다. 오히려 아 코루냐가 포르투에서 더 가깝다는 사실도.
결국 최종일정은 말라가-론다-그라나다(이상 스페인 남부)-바르셀로나(스페인 북동부)-리스본-포르투(이상 포르투갈)-아 코루냐(스페인 북서부)-바르셀로나, 라는 매우 광대한 스케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겨우 12박 14일의 일정에 스페인 남부부터 북부까지 돌고, 거기에 포르투갈까지 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어이없는 일정이었지만, 이것이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결국 적어도 기차나 버스로 12시간 이상이 걸리는 그라나다-스페인 구간, 바르셀로나-리스본 구간, 아 코루냐-바르셀로나 구간은 모두 비행기를 이용하고 말았다. 그나마 바르셀로나-리스본 구간에서 이용한 TAP 포르투갈 항공사에서 결제할 때 탄소상쇄옵션을 선택한 게 아주 조금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세 구간의 비행기 이용을 제외하고는 처음의 다짐대로 나머지 구간에서는 기차노선이 없는 말라가-론다 구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차로 이동했다. 심지어 포르투-아 코루냐 구간은 7시간 동안 기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말이다(이 노력이 헛되지 않게 아 코루냐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리고 축구경기 역시 환상적이었다).
터키를 거쳐 20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지나 도착한 말라가는 피카소의 고향이자, 스페인의 대표적인 휴양도시 중 한 곳이었다. 체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기에 첫 여행지인 말라가(1박)와 중간인 바르셀로나(3박), 마지막 여행지인 아 코루냐(2박)는 혼자 쓸 수 있는 호텔로 숙소를 잡고 나머지는 모두 현지인이 운영하는 호스텔 도미토리를 예약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말라가의 호텔은 가족이 운영하는 아담하고 비싸지 않으며, 중심지와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와 아 코루냐에서는 여러 사정 상 스페인의 호텔 체인에서 묵게 되었다. 모두 특가가 나와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처음 예약을 할 때는 망설이기도 했다. 그것이 외국기업이 아니더라도 과연 호텔 체인에서 묵는 것이 바람직한가는 꽤 심각한 고민이었다. 반면 여행하는 국가의 호텔 체인이라면 내가 지불하는 비용이 현지로 돌아가는 것이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얄팍한 생각이지만 결국 내 몸의 편의를 위해 난 그 얄팍한 생각에 굴복하고 말았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 자신을 위해서는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머무는 동안은 지독한 감기로 너무 아파 하루 종일 숙소에 누워있어야 했고, 아 코루냐는 호스텔 자체가 없는 고급 휴양도시였기 때문이다.
말라가와 말라가에서 버스로 2시간이 채 안 걸리는 론다는 모두 작은 도시라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자연과 역사가 그래도 남아있는 넓은 평원의 땅, 안달루시아는 그저 두 다리만으로도 지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이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도시에서는 모두 교통패스를 끊어 버스와 트램, 지하철 등을 이용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도시들은 대부분 여행자를 위한 교통패스나 혹은 현지인이 사용하는 교통패스가 있어, 그것을 구입해 사용하면 편리하다. 아 코루냐만 유일하게 버스를 탈 때마다 돈을 지불해야 했는데, 그곳은 한국과 같은 교통카드 시스템이어서 단기 여행자는 구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금 큰 도시인 그라나다와 대도시인 바르셀로나, 언덕이 많은 리스본을 제외하고는 교통패스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만큼 걷기에 좋은 도시들이었다. 심지어 5일을 머물렀던 바르셀로나에서도 10회권을 1회 남겨 오기도 하고, 대서양을 마주보는 해안도시 아 코루냐에서는 도시 해변의 끝부터 끝까지 6시간 동안 걷기도 했다. 그래도 힘들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어느 도시도 한국처럼 매연이나 소음이 심하지 않았고, 곳곳에 쉬기 편하고 아름다운 공원과 벤치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도 정비가 잘 되어 있고, 보행자 절대 중심의 문화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2주간의 여행 동안 거의 매일을 6-7시간씩 걸을 수 있던 이유이다.
특히 산책을 즐겼던 도시는 그라나다와 바르셀로나, 아 코루냐이다. 그라나다는 무엇보다 알람브라와 그 주변의 숲이 멋있었다. 구 시가지(관광 중심지)에서 알람브라까지 가는 많은 길들이 모두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숙소에서 알람브라까지 가는 길 역시 작은 개울이 있는 숲으로 지나가야 했다. 특히 같은 호스텔에 묵었던 스웨덴 장기여행자가 알려준 숙소에서 알람브라로 가는 길은 대부분의 관광객이 모르는 길이라(단 한 명의 동양인도 보지 못했다) 그라나다에 머물던 이틀 동안 오전, 오후 내내 머물며 책도 읽고 맥주도 마시고,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리고 그라나다가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바로 특별한 인연을 만났기 때문이다. 묵었던 숙소가 집시들이 모여 사는 알바이신지구로, 한국으로 치면 일종의 산동네였다.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위험한 곳이라고 소문이 나 잘 가지 않는 곳인데, 나는 알람브라가 한눈에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숙소를 정했었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사람들이 알아서 도와주기 시작했는데, 결정타는 길을 잃고 헤매던 내게 그곳에 사는 젊은 부부가 점심도 만들어주고 숙소까지 짐을 들어다준 것이다. 브라질 청년과 스페인 처자, 그리고 그들의 갓난쟁이 아들은 일본에서 플라멩고를 배우러 스페인에 온 일본인 처자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처음 나를 보고 일본인 처자의 친구인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다 아닌 걸 알고는 숙소를 찾아준 후 언제든 와서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말했다. 결국 가기 전에 그 일본인 처자와 만나 같이 플라멩고를 보기도 했다. 고마운 인연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호텔이 캄프 누(FC 바르셀로나 홈구장), 그리고 몬주익 언덕(바르셀로남서쪽에 있는 산. 미로미술관 등 박물관 등이 몰려 있다)과 가까웠다. 관광지라기보다는 주택지에 가까웠기 때문에 아침, 저녁 산책을 하며 출근하는 직장인들도 많이 보고 공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많이 봤다. 몬주익에서는 푸른 숲이 너무 좋아 3시간 넘게산책을 하고 꽤 먼 거리에 있는 고딕지구(구 도심. 관광 중심지 중 하나)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날은 토요일이었고, 이곳에서의 첫 일정은 바르셀로나 B팀 경기를 보는 것이었다. FC 바르셀로나의 팬이기에 가능했던 일정이지만, 오히려 현지인들의 일상적인 주말 풍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가는 곳은 가우디, 고딕․바리지구 등으로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는 현재 바르셀로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보기는 힘들다. 이곳 사람들에게 축구는 너무 일상적으로 사랑하는 그 무엇이다. 이날 경기는 2부 리그 경기임에도 사람이 많았고, 특히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표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 물어보는 내게 확실히 모르겠다며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알려준 이도 있었고, 구장이 어딘지 물어만 봐도 꼬맹이들 손을 잡은 중년의 아저씨가 환히 웃으며 자기만 따라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아주머니는 표를 사려고 줄 서있는 내게 오늘 경기는 B팀 경기라며, 혹시 A팀 경기인 줄 알고 착각해 잘못 사지 않을까 걱정해줬다. 알고 있다고, 걱정마시라고 안심시켜드리긴 했지만 말이다. 또 어떤 커플은 핫도그를 먹느라 정신이 나간 내가 떨어뜨린 지갑을 친절이 주워주기도 했다. 바르셀로나는 유럽에서도 소매치기 많기로 악명 높은 도시여서, 가방에 옷핀을 크로스로 매달고 다니며 경계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던 순간이었다. 이곳 사람들이 내게 친절하고 마음을 여는 만큼 나는 열린 마음으로 여행을 하고 있던 걸까? 지금 생각해도 창피한 기억이다.
아 코루냐는 다른 무엇보다 해변과 해변 산책로, 공원이 무척 아름다운 도시였다. 바로 대서양에 면한 도시는 해안가 끝에서 끝까지 모두 산책로로 이어져있었다. 한국 같으면 그곳은 차도가 되었겠지만 이곳은 인도, 자전거도로, 그 다음이 차도 순이었다. 중간 중간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적절하게 놓여 있었고, 현존하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인 에르쿨레스의 등대 주변은 아주 멋진 공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공원에는 세상에서 가장 잠들기 편한 벤치가 있었다. 언덕의 자연적 지형을 이용해 만든 그 벤치에서 30분 가까이 낮잠을 자기도 하고, 오렌지를 까먹기도 하고, 낚시꾼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날은 걷다 쉬다 걷다 쉬다 하며 6시간을 넘게 걸었는데, 정말로 오랜만에 온전히 혼자임에도 따뜻하고 충만한 시간이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것 같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혼자 유럽여행을 할 때, 공정여행의 몇 가지 수칙을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걸 느꼈다. 장기여행인 경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직장인이 할 수 있는 1주일, 2주일간의 여행은 여러모로 힘들다.
우선, 넓은 지형적 특성상, 그리고 비싼 기차요금의 특성상 비행기를 타지 않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그라나다-바르셀로나 구간에서 12시간 걸리는 야간침대기차 대신 2시간이 채 안 걸리는 비행기를 택한 건 무엇보다 비용적 측면이 컸다. 비행기가 60유로 정도인 데 비해 야간쿠셋은 100유로가 넘었고, 시간도 더 오래 걸렸다. 시간도, 돈도 없는 여행자는 비행기를 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랄까?
두 번째는 언어의 문제다. 이건 호스텔에서 묵을 때 느꼈던 건데, 현지인과도 여행객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쌓으며 최대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여행을 하고 싶을 경우 어느 정도 유창한 영어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만으로, 조금 더 생각을 나누고 현지의 생활을 맛보고자 해도 소통이 안 되면 불가능하다. 다행히도 그라나다에서는 길을 잃은 덕에 좋은 현지 친구들을 만나 저녁 식사에 초대도 받고, 함께 플라멩고 공연을 보기도 하고, 포르투에서는 호스텔 아가씨에게 포르투갈 음악을 소개받기도 하고, 현지 워킹투어를 통해 다른 나라 여행객들과 짧은 교류를 하기도 했지만 더 깊이 발전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언어능력에 따라 현지인 투어를 하는 것도 무리가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이란!
세 번째는 숙박시설의 문제이다. 유럽 여행을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숙박시설은 한인민박, 호스텔, 호텔 등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인민박과 호스텔을 이용한다. 하지만 조금 고민을 했던 것은 한인민박 역시 현지에 사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것이니까 결국 현지 숙박시설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그들은 완전한 현지인이 아니잖아, 라는 부분이었다. 결국 한인민박에서 묵지는 않았지만, 이 부분은 앞으로 유럽의 다른 국가를 여행하면서도 계속 고민이 될 부분인 것 같다.
3번의 비행기 이동과 2번의 호텔 체인 숙박 등 처음 계획에는 못 미치는 부분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래도 모두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박시설에서 묵었고, 한 번도 맥도날드나 스타벅스를 가지 않고 현지인이 운영하는 작은 바르나 레스토랑에서 식사했으며, 메이드 인 차이나인 기념품을 사지도 않았고, 하루에 6-7시간씩 걸으며 풍경을 보고, 명상을 하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심지어 축구는 가장 비싼 표를 사서 보기도 했다(이게 그들의 힘든 경제에 우주의 먼지 같은 크기일 망정 기여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이 정도면 처음 혼자 한 공정여행치고는 꽤 훌륭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