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홍승해/ 사진_공감만세
여행. 이 두 글자는 언제 들어도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 여행문화를 보면 소비의 한 형태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타지에 가서 현지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여행을 갔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고 여행을 간 건지 면세점을 간 건지 착각이 들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행을 동경하지만 그 의미에 따라서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여행이 아닌 제게 약이 되었던 여행을 풀어볼까 합니다.
2010년 7월, 당시 전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토익학원을 등록하였습니다. 곧 있으면 취업준비생이 될 것이기에. 그러나 취준생의 다짐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 날 저녁, 아버지께서 제게 비행기 티켓을 건네신 겁니다. 그리곤 짤막하게 한 마디 하셨습니다. ‘다녀 와.’ 아버지는 1986년 대한민국 최초로 히말라야의 봉우리 중 하나인 K2라는 산을 등정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히말라야에 연을 맺은 아버지는 취업을 준비하는 정신없는 아들을 네팔에 보내기로 결정하시고 표를 내미신 겁니다. 네팔 행 비행기 티켓 한 장. 기간은 한 달.
출국 당일. 태어나서 처음 떠나보는 혼자만의 외국여행, 그 순간 느꼈던 오묘한 감정은 설렘과 두려움이 엉킨 희열이었던 듯합니다. 무사히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으로 나왔을 때 처음 받았던 느낌은 소박함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인천국제공항은 크고 화려한데 비해 네팔 공항은 작고 소박했습니다. 벽돌로 지은 공항, 울퉁불퉁해 보이는 활주로, 듬성듬성 심어져 있는 나무들. 귀엽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공항도 대한민국다울 순 없는 것인지. 그렇게 만감이 교차하여 공항 출구로 나왔을 때, 아버지의 영문성함을 들고 있는 댄디 씨가 유창한 한국말로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댄디 씨의 집은 어머니와 아내, 두 딸과 같이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짐을 푼 뒤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사는 네팔의 전통음식인 달밧이었습니다. 달밧은 우리나라 음식으로 치면 국밥과 같습니다. 달은 보통 국을 졸여서 걸쭉하게 끓이고 밧은 안남미로 약간 퍼지는 쌀로 밥을 만듭니다. 실제로 맛을 보니 독특했습니다. 가끔 난을 빚어 달에 찍어먹기도 했고 국수를 만들어 볶음으로 먹기도 했습니다. 다행이 모든 음식이 제 입맛에 맞았습니다. 대부분 여행을 가면 외국의 한국음식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을 가곤 하는데 이러한 면에서 저는 현지 가정식을 먹는 재밌는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현지인의 식문화를 알면서 그들만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고 그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더 가까워 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지인과 비슷하게 살아보는 것, 이게 바로 여행의 재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네팔 카트만두에서의 생활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다만 의사소통하는데 있어서 조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댄디 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한국어를 못하셨지만 영어는 다들 저보다 훨씬 잘하셨습니다. 제 해괴한 영어 실력에 현지인들이 대화하는 내내 웃었던 게 떠오릅니다. 오전에는 댄디 씨의 사무실에 출근해서 직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도 있었고 한국어로 표기된 메일을 번역해 설명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 직원들이 저를 데리고 카트만두 시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시켜주었습니다. 현지인보다 더 좋은 가이드가 있을까싶네요. 네팔은 불교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지역에 불교유적이 눈에 띄었고 ‘스투파’라는 불탑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부처님의 눈을 형상화해서 만든 이 탑은 기이하기도 하고 경외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스투파의 앞에서 향을 피우고 커튼에 가려져 있는 마니차를 돌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며 가족들의 안영을 바라는 네팔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 친근하기도 했죠.
네팔에서 이용한 교통수단은 대부분 오토바이와 Micro버스입니다. 처음 네팔에 도착하여 교통상황을 보고선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비포장도로 위로 먼지가 나며 신호등 또한 별로 없었고 도로는 경적소리로 무척이나 시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좁은 도로에 소가 나타나 도로를 점령할 때는 오토바이는 피해갔지만 버스는 빼도 박도 못하고 소가 움직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이러한 광경을 보고 ‘아, 이곳이 정말 네팔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들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의외로 교통사고가 거의 없다는 댄디 씨의 말이 공감이 갔습니다. 쉼 없이 경적소리가 울리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네팔은 ’차가 지나가고 있으니 조심하세요.’ 라는 의미의 경적소리였고 보행자들이 길을 건너는 곳이 표시는 되어있지 않지만 암묵적으로 약속된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 곳을 지날 때면 차들은 늘 서행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배려가 있었고 보이지 않는 신호들이었던 셈이지요. 나중에는 저도 어느새 현지인들처럼 능숙하게 건너다녔습니다. 그렇게 카트만두에서 2주 정도 지내며 제가 가장 바래왔던 히말라야 포카라를 가기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포카라에 갈 때는 현지에 빠삭한 벤바 씨를 소개받아 같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포카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히말라야 산맥이 보였습니다. 그 웅장함은 가히 압도적이었지요. 제가 살고 있는 집도 북한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산을 매일 볼 수 있는데 그런 것과는 비교가 안됐습니다. 왜 히말라야를 신들의 영역이라고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산과 논밭이 어우러져 있는 산악지역에서의 트레킹은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에 좋았습니다. 힘이 들면 트레킹코스 곳곳에 있는 Lodge라는 산장에서 차를 마시기도 하고 끼니를 해결하며 달콤한 휴식을 취했고 저녁이 되면 이곳을 이용하여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잠을 청했습니다.
3박 4일 동안, 히말라야의 TIKHEDHUGA→GHOREPANI→GHANDRUK→DHAPUS를 거치며 심신이 지치기도 했지만 잠시 숨을 고르거나 사진을 찍으면서 히말라야의 웅장한 모습을 볼 때면 기분 좋은 피로감에 몽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높은 고지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보며 느낀 건 빛 한 줄기, 물 한 모금, 소금 한 줌을 소중히 할 줄 알았으며 그것을 선물한 자연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그들에게 자연이란 정복이나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삶이었으며 같이 살아가야할 공존의 대상이었고 언제나 자신들에게 선물을 주는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살기에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네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인연에도 눈이 마주치면 먼저 웃으면서 인사 해주었습니다. 네팔에서의 따뜻함이 아직도 제 가슴 속에 살아남아 미소 짓게 만듭니다.
한 달 동안 네팔의 대표적인 도시인 카트만두와 포카라에 머물며 소소한 추억을 쌓았습니다. 그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따르며 화려하진 않지만 그렇다 해서 초라하지 않는,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행복을 느끼고 사랑하고 있는지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유적지를 훑어보고 사진을 찍고, 온전히 느끼기보다 여행가이드가 말해주는 설명을 들으며 마음에 새기기 보단 한 귀로 흘리기 바쁜!
끼니는 여행 일정이 바쁘니 패스트푸드로 때울 때도 있고 유명한 음식점에 찾아가서 우리나라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는! 이러한 여행이 아닌 현지인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하고 그들의 생활방식에 맞춰 지내보며 우리와 다른 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여행. 저는 앞으로도 이러한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떠나는 게 아닌 마음으로 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람과 사람은 어딜 가나 같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 NEPAL, Never Ending Peace And Love라는 말처럼 어딜 가나 행복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네팔 여행. 밝고 맑은 그들의 에너지가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저를 행복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