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박선아/ 사진_공감만세
짧은 여정이지만, 너무나 많은 고민과 생각과 벅찬 감격을 안으로 껴안은 날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4박5일간의 필리핀 공정여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한 몇 년은 떨어져 있다 만난 것처럼 아이 아빠와 뜨거운 재회를 하고는 곧바로 딸아이 손양과 동네 목욕탕에 갔었습니다. 늦은 시간인데도 탕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손양보다 조금 어린 아이가 샤워기의 물을 계속 틀어 놓은 채 장난을 하고 있자, 손양의 얼굴이 이내 일그러졌습니다.
“ 저러면 안 될 것 같아. 미안한 일이잖아!” 나는 손양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 바나우에와 바타드 지역에 머무르며 손양은 ‘절대 불편‘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졸졸졸 나오는 차가운 계곡물을 모아 샤워를 하였고, 바타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샤워 물을 양동이에 받아 두고 그 물로 화장실 용무를 본 다음 뒤처리를 하였습니다. 앞 사람이 물을 조금 많이 사용하며 샤워를 했을 때는 어김없이 샤워꼭지에서 물이 똑 끊겨서 샤워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누군가를 위해 물을 아껴서 민첩하게 샤워를 하여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정전까지 되어서 촛불에 의지한 채 몇 시간을 보내야 했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러한 ‘절대 불편’이 ‘절대 행복’으로 느껴졌습니다.
손양과 필리핀에서 보고 느낀 것은 이러한 절대 불편이 행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와 닮아 있는 식민지 역사의 아픔을 안고 있는 필리핀도 만날 수 있었고 그리고 생각보다 너무나 가난한 필리핀 친구의 옹색한 모습에 가슴이 저며 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는 다른 화려한 필리핀의 별천지 세상도 만났습니다.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이 미안해져서 사실 그 어느 여행 때보다 소심해진 나는 가져간 선물을 하나도 나눠주지 못한 채로 돌아왔습니다. 반면 손양은 ‘엄마는 너무나 여행자 티를 낸다’며 일장 훈계를 하더니 현지인처럼 씩씩하게 지프니 지붕 위에 올라가 비포장도로를 달렸고 닭 12마리와 돼지 2마리를 키우고 있는 바타드의 친구에게 선물을 전해주고 그 마을에 머무는 내내 친구 집에 들락날락대며 정을 쌓아가기도 했어요.
8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바타드의 계단식 논 이상으로 모든 것이 내게는 ‘불가사의’했던 그 기억들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떠오르며 집 근처 마트에서 생필품을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감사하고 카메라 배터리를 손쉽게 충전할 수 있는 전기시설이 갖춰진 좋은 집에 산다는 것도 감사하고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목욕탕에 올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콸콸 쏟아지는 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나 감사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날 지경인데…….그러니 나는 목욕탕 안에서의 손양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한 여행의 첫 날, 함께 여행을 한 공정여행 코디네이터 분에게 ‘나에게 여행이란?’ 질문을 받았을 때,아홉살 된 딸아이 손양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에게 여행은 즐거움과 취미! "
그렇다면 '공정 여행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는 또 이런 답을 하더군요." 그 나라의 문화, 그 지역의 말씨를 같이 따라해 주고, 여행하는 동안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대신 쓰레기 100개씩 줍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게 아니라 여행하는 지역의 친구에게도 맞춰주는 것이에요. " 라고요. 그렇다면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여행이란 ‘하다보면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을 열어 보이는 삶의 고민을 던져주는 것!’ 그럼, 공정여행이란 무엇일까요? 한 아이의 엄마이기 전에도 나는 여행자였고 그리고 한 아이와 함께 그 여행을 계속 하면서 '공정하고 착한 여행자의 모습'에 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지치고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 하얀 파도가 부드럽게 밀려드는 야자나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 망고쥬스 한 잔을 들이키는 여행자는, 며칠간의 화려하고 편안한 남국의 리조트 여행에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행도 참 좋은 여행입니다. 다만, 그 여행의 이면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는 말자! 외면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이내 내 주변을 조금 더 관심 있게 들여다 볼 것이고, 그 관심이 나의 여행을 훨씬 착하고 공정하고 편한 리조트 여행으로 탈바꿈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어느 날, 한국사람 10명이 여행을 떠날 때 현지인(특히 저개발국) 1명도 함께 떠날 수 있는 여행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런 불편할 수 있는 질문과 관심이 여행지와 그 곳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가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남루한 삶일지라도 그 자체로 그 삶을 존중하는 겸허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하던 중, 좋은 벗들과의 특별한 여행을 지난 5월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필리핀 공정여행은 '공감만세'라는 사회적 기업의 팀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공감만세'는 멋진 청년 사회적 기업이었고 착한 여행자들이었습니다. 기업의 대표와 직원들이 모두 20대 청년들이고 그러한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이 처한 넉넉한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공정함'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 나는 그들의 용기와 적극적인 시도에서 우리의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고,더불어 여행자로서의 나의 꿈을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몇 안 되는 동행이었지만 힘든 여정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으며 필리핀의 다양한 모습을 때론 아프게, 때론 기쁘고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함께 한 닷새 동안의 짧은 필리핀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이런 질문을 다시 던져 보았습니다.
손양은 짧은 단어 10개를 즉석에서 답해 주었습니다.
" 친구, 동물, 가난, 행복, 계단식 논, 강아지, 탑피야 폭포, 지프니, 버블티, 그물 침대 "
무라카미 류의 '무취미의 권유'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동기부여라는 개념은 꿈, 희망과 짝을 이룰 때에만 성립한다고요. 어떤 일을 해내는 것이 자신은 물론 가족과 동료, 사회에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 준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요. 손양의 학기 초에 '아이의 장래희망에 부모의 바람'을 묻는 조사서가 있었어요. 나는 그 항목에 '아이의 꿈만을 응원한다.'고 답했었지요. 그런데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손양에 대한 작은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손양이 앞으로 '돈'보다는 '명예',그리고 명예보다는 사회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 바람은 저에게도 해당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