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_김태형 여행운용2팀장
빛의 축제 로이크라통 우리의 여행은 태국 치앙마이를 돌아보며 태국인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을 주민들과 함께 태국에서 가장 낭만적인 축제라는 풍등 축제 로이크라통을 즐기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 일정이었다.
로이크라통은 바나나 잎으로 만든 연꽃 모양의 작은 배에 초를 실은 크라통을 강에 띄워 보내고, 풍등을 하늘로 날리는 태국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물의 정령에게 크라통을 강에 띄워 보내는 것으로부터 유래하였으나, 사람들이 함께 날리는 풍등이 하늘을 밝게 수놓는 풍경이 장관의 극치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강과 하늘을 밝게 수놓는 크라통과 풍등 때문에 사람들은 로이크라통에 빛의 축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태국의 낭만, 로이크라통을 즐기기 위하여 치앙마이를 찾았다. 로이크라통을 즐기기 위한 우리의 첫 번째 순서는 크라통을 만드는 것이었다.
크라통을 만들기 위해 바나나 잎을 한 뭉텅이 사서 마을주민의 집을 찾았다. 우리는 여기서 할머니와 함께 크라통을 만들게 된다. 바나나잎을 종이접기 하듯이 세모나게 접어서 동그란 나무도막에 붙인 뒤 형형색색의 꽃으로 장식하면 끝. 말은 쉬운데 왜 이렇게 모양이 안나오는 건지. 할머니가 만드는 건 참 예쁜데 이런, 내껀 그냥 별모양의 풀 덩어리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나를 보며 잘했다고 쉴새없이 환한 미소로 엄지를 치켜든다. 응? 진짜 잘한건가? 하도 살갑게 대해주시니, 진짜 잘하는 건지 분간이 안되어 스스로의 작품에 도취되고 말았다. 하긴. 모양이 중요한가, 의미가 중요한거지 뭐.
사실 이 할머님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신다. 당연히 나랑 한마디도 통할리 없다. 그런데 참 신기한게 서로 30분 웃고 떠들며 열중하다보니 대충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언어라는 건 역시 도구에 불과한 건가. 할머님의 미소에 취해, 사람의 정에 취해, 사람사이에는 언어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크라통을 만들기를 한 시간. 결국 우리는 제대로 된 크라통 하나 만들지 못했지만, 우리는 할머님이 정성스레 만들어주신 크라통을 한 개씩 손에 들고는 치앙마이 시내로 향했다.
풍등 하나에 소원하나, 소원 하나에 행복하나 치앙마이에 도착한 우리, 태국의 심장사원이라는 왓프라탓도이수텝에 먼저 들렸다. 황금빛 사원에 정신이 나가 주위가 어두워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저 멀리 풍등 하나가 빨가안 불빛을 발하며 나지막히 솟아오른다.
아, 저게 바로 로이크라통 축제의 풍등이구나. 언제 떠오르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풍등이 떠오르자 주위의 모든 시선이 그 조그마한 등에 꽂힌다. 그게 신호였을까. 한 개였던 풍등이 수십이 되고 수백이 되어 곧 수천이 되었다.
온 하늘을 가득 수 놓은 수천개의 빨간 불빛들. 그 장엄한 풍경을 보며 나는 저 많은 풍등을 하늘에 띄우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가족의 행복을 빌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연인과의 변치 않는 사랑을 빌었을 수도 있다. 아, 또 다른 누군가는 연인을 만들어 달라고 빌었을 수도 있겠지. 하늘을 가득채운 저 불빛 하나 하나에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 함께 담겨 빛을 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보고만 있을 수 없지. 길 가에서 풍등을 하나 사서 사람들로 번잡한 도로 한 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한명씩 풍등의 모서리를 잡고, 성냥으로 불을 붙이니 구겨져있던 종이가 이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제 모습을 갖추며 빨갛게 빛난다. 두터운 공기를 가득 머금은 풍등이 이제 그만 놓아달라고 아우성을 치길래 두 손을 슬며시 놓았다.
둥실 떠오른 풍등이 덩실 춤을 추며 하늘로 사뿐히 날아올랐다. 목이 뻐근해 질 때까지 쳐다보고 있는데. 아차, 소원을 빌지 않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사실 이미 너무 높이 올라가버려 어느 게 내 것인지 분간도 안되었지만 간절히 기원하면 이뤄질거라 믿으며 두 눈을 꼬옥 감고, 나도 정성스레 소원을 빌었다.
저 하늘에 띄워진 많은 소원을 하나도 빼먹지 말고 모두 이뤄달라고. 저 많은 소원 중 중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 너무 많은 소원이 한번에 하늘나라를 찾았다고 당황하지 말고 모두 이뤄달라고. 풍등 하나에 소원하나. 소원하나에 행복하나. 사람들의 소망으로 가득 찬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행복전도사 ‘피요’를 소개합니다. 우리의 모든 일정에는 태국 현지인이 늘 함께 했는데 그 친구가 바로 ‘피요’다. ‘피’는 우리말의 ‘님’과 같이 상대를 높여주는 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요 형님’정도 되시겠다.
요는 ‘치앙마이에서는’, ‘치앙마이 사람들은’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태국 치앙마이 보통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실제로 우리는 시장에서 직접 장을 보고(때로는 흥정도 하면서), 전통 방식으로 염색 체험도 하며, 스님들에게 아침 공양을 하는 등 태국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피요’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피요’는 온 동네 주민이 자기 친구인 듯 했다. 나는 일정 내내 ‘피요’에게 “학교에 방문해서 아이들을 보고 싶어”, “마을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놀고 싶어”등 마치 애가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듯이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부탁들을 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피요’는 학교의 선생님과 마을의 예술가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모든 일들을 실제로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 뿐인가. 예술가들과 함께 어울렸던 마을의 조그마한 술집의 주인이 알고보니 태국에서 유명한 모델이어서 스튜디오와 같은 곳에서 멋지게 사진을 찍어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심지어 ‘피요’는 생일을 맞은 나를 위하여 마을주민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위의 사례를 보아 단언하건데, ‘피요’는 우리의 가이드가 아니었다. 그는 치앙마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최고의 전문가이자, 우리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나의 첫 해외여행 이야기 이쯤에서 내 첫 해외여행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첫 번째 해외여행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떠났던 태국 방콕 여행이었다. 3박 4일의 방콕 여행 내내 계속 되었던 건 버스와 쇼핑이었다.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그 긴 시간을 달래기 위해 버스는 끊임없이 어딘가에 멈추어 섰다. 그 곳은 때로는 한약방이었고, 공예품점이었으며, 보석상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버스가 그 곳에 들렸던 건지, 그 곳들을 다 들려야 했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멈춰 선 버스가 다시 달릴 때마다 일행의 손에는 쇼핑백이 한 두 개씩 쥐어져 있었다.
첫날 밤 우리는 시장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가이드는 ‘위험하니 안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가이드에 따르면 밤의 태국은 무법자, 부랑자의 천국이었다. 한 참의 실랑이 끝에 우리는 우리끼리라도 가겠다며 호텔을 나왔고, 몇 시간 동안 태국의 밤거리를 배회했다. 열대 과일을 마음껏 사고, 길거리에서 파는 쌀국수를 먹었으며, 트럭 뒷자리에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몇 시간이 내 태국여행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의 3박4일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자기 말만 따르라는 가이드를 아버지는 4일 내내 못마땅하게 보셨다. 한약방에서도, 공예품점에서도, 보석상에서도 우리는 아무 것도 사지 않았다. 가이드는 옆에서 쉴 새 없이 눈치를 주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더 없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곤 했다. 가이드가 여기는 마지막이니 제발 가달라며 데려간 저녁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된 실제 식사 가격이 우리가 낸 돈의 1/10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가이드에 대한 신뢰도, 우리의 휴가도 완전히 망가졌다.
나중에 안 사실에 의하면 그 태국 방콕 여행은 비행기값보다도 산 35만원 방콕 패키지였다. 더 나중에 안 사실에 의하면 같이 간 아버지 친구는 그 여행에서 옵션과 쇼핑으로 400만원을 사용하고 왔다고 했다.
여행을 마치며 여행을 하는 내내 함께 한 사람들은 ‘꼭 친구와 같이 배낭여행 하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사람들은 ‘여유로운 쉼’과 ‘현지 문화 체험’을 갈망하며 여행을 떠나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 둘을 만족 시켜주는 여행은 많지 않다. 때문에 ‘친구와 함께 한 배낭여행’은 모든 여행을 기획한 내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우리는 쇼 공연장에 올라가는 가공된 현지 문화가 아니라 현지인과 함께 어울리는 과정을 통하여 태국 북부지역만의 고유한 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모든 일정에는 태국 사람이 함께였으며 그는 여행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는 가이드가 아니라,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 우리의 여행은 빛의 축제 로이크라통의 아름다움에만 현혹되지 않고, 그 내면에 깃든 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자세히 보는 그런 여행이었다. 우리가 여행을 하며 사용된 모든 경비는 관광이 주민에게 보탬이 되는 윤리적 소비로 사용되었으며, 고스란히 태국 현지인의 사회에 돌아가며 관광으로 인한 주민의 삶의 질 형성에 기여할 수 있게 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좋은 여행은 모두의 가슴을 설레이게 해야한다고. 여행자 그리고 원주민. 모두가 함께 설레이는 여행이 될 때 세계 관광기구가 주장하는 여행의 ‘세계 평화 기여’와 ‘경제발전’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여행 앞에 ‘공정’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 공정여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찌보면 참 슬픈 일이다. 모두가 공정여행을 떠나지 않기에 공정여행과 여행을 구분하는 것이다. 모두가 우리와 같은 여행을 당연히 여기게 될 때 ‘공정여행’ 앞의 두 글자는 슬며시 사라지게 될게다.
나 혼자 설레이는 여행이 아니라, 모두가 설레이는 여행이 당연해 지는 그 날이. 소비가 아닌 관계로써의 울림을 향유하는 여행이 당연해지는 그 날이.
우리가 이 여행을 느낀 뭉클함과 감동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는 그 날이 조금이라도 앞당겨지기를 소망하며, 나는 오늘도 내일의 여행배낭을 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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