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_김태형 여행운용2팀장
칠 개월간의 타지생활동안 참 돌아다니기도 많이 돌아다녔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세계 최고를 자처하던 많은 곳들을 돌아다닌 뒤에 내게 남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에 대한 갈증. 특히 그 동안의 배낭여행으로 쌓인 경험들을 공정여행에 녹여보고 싶은 욕구는 커져만 갔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불과 2주만에 다시 찾게 된 인천공항.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온 기회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태국 치앙마이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내가 한 일은 한국태국학회가 펴낸 ‘태국의 이해’를 펴는 것. 기존의 패키지 여행이 재미없는 것은 가이드만 모든 것을 다 알고, 결정하는 불합리한 구조 탓이다. 여행자가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내용과 질이 바뀌는 것은 당연. 여행을 떠나기 전에 현지에 대하여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공정여행은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야심차게 책을 폈건만 몸은 좀처럼 마음의 결심을 따라주지 못한다. 아유타야, 쑤코타이, 낯선 태국어는 눈을 스쳐지나갈 뿐 머리까지는 미처 들어오지 못해서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이내 스물스물 잠이 오기 시작한다. 잠을 깨보려 홀짝홀짝 물을 마셔대며 책장을 넘기길 몇 시간. 태국의 역사에 대한 파트가 끝나고 책이 태국의 현 국왕인 푸미폰 국왕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쯤 비행기는 우리가 치앙마이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태국은 프랑스와 비슷한 크기의 나라다. 한 해 10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태국을 찾는다 하니, 더 이상 태국에 갔다왔다고 자랑거리는 못될 듯 하므로 태국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 많은 한국인들이 태국에 갈 때 들리는 도시는 태국의 수도인 방콕, 그리고 휴양지로 유명한 파타야다. 우리가 오늘 찾을 치앙마이는 한국에는 골프여행지로 잘 알려진 곳으로써 태국 북부의 거대한 산악지역에 널리 펼쳐져 있는 곳이다. (..중략..)
낯선 타국의 공항이 조금 눈에 익을 무렵, 치앙마이 공항에 일행이 도착했다. 일행이 도착하고도 한참 뒤에야 우리를 데려오는 태국인 스텝 ‘요’. 약속시간인 11시가 한국시간으로 11시인줄 알았다며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는 그가 미워야 정상이건만, 스멀스멀 사람좋은 미소를 씩 지어대니 화를 내기도 뭐해 몇 마디 핀잔을 주는 걸로 넘어가기로 했다.
태국인은 상당히 약속시간에 관대한 편이다. 하긴 꼭 태국인으로 규정할 문제는 아닌 것이, 우리도 예전에는 한국인도 약속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법이 없어 Korean Time이란 말이 있었다고 하니 이유가 어찌되었든 모든 상황에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기 보다는 문화적인 차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어가는 것도 여행지를 더 즐겁게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한다.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이동했을까, 송크란과 치앙마이 지역에 관한 대표님과 ‘요’의 설명을 듣다보니 우리는 이내 YMCA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성대하게 음식을 내 놓는 그들.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 꾸어이티야오(쌀국수)에 무삥이라는 이름이 돼지꼬치구이에, 한상 가득 차려놓은 음식들을 보니 이게 저녁식사인건지 야식인건지 도통 구분이 안된다. 전반적으로 음식의 간이 조금 센 편이긴 했지만 시장했던 탓에 2그릇의 꾸어이티야오를 먹어치우고도 기름기 가득한 무삥까지 몇 개 집어들었다.
한창 식사를 하고 있는데 ‘요’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면서 태국의 맥주 싱하를 몇 캔 가지고 온다. 이미 시계는 12시가 넘어 1시를 향해가고 있었건만 그들의 정이 가득 담긴 맥주 한 잔은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10년 전 패키지 여행으로 태국을 찾았을 때는 태국 사람과 한마디도 해 볼 수 없었는데, 오자마자 태국인과의 술자리라니. 3일간 우리가 만날 태국은 10년전의 태국과는 크게 다를 것이란 느낌이 든다. 그렇게 우리는 태국의 음식과 태국의 맥주를 마시며, 태국의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조그만 농촌마을 나꽈우끼우에 가다 오늘은 태국 북부의 나꽈우끼우 마을로 이동하는 날.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의 나꽈우끼우 마을은 공감만세의 태국 여행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나꽈우끼우 마을은 치앙마이와 가까운 람팡에 위치한 평화로운 농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람팡에 관광객이 몰리면서 동네의 물가와 임대료가 상승하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땅을 담보로 은행에 빚을 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도 자본의 침탈이 시작된 것. 다행히도 마을 사람들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렇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이 조직을 만들어 현실을 알리고, 교육을 시키는 일을 시작했으니 이 마을조직이 바로 학남장이다. 그렇게 학남장은 나꽈우끼우 마을에서 자리를 잡고, 조직의 이름으로 잃었던 토지들을 다시금 조금씩 조금씩 구매하여 유기농작지로 변모시키기 시작했다.
공감만세가 나꽈우끼우 마을을 만나고 마을에서 공정여행을 시작한 것도 그 때쯤이었다. 공정여행은 여행의 참가자이던 청소년들과 마을 주민 모두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다주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홈스테이를 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든 과정들은 한정된 관계 속에서 경쟁에 익숙해져있던 청소년들로 하여금 관계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계기를 만들어주었으며 마을 사람들 또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자신의 마을에 들어온 이국의 청소년들과 공정여행을 진행하며 자존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지속적인 공정여행을 통한 태국 북부의 마을만들기를 위해 람팡 주 정부, 태국북부개발재단, 메조대학교, 학남장, 공감만세 등이 모여 태국 공정여행 및 사회공헌 양해각서 체결을 한 이후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탄력을 받기 시작해서 지금은 청소년 여행학교, 청년 해외자원봉사 등 다양한 공정여행 프로그램과 함께 나꽈우끼우 평화도서관이 성공적으로 운영중이다. 우리는 1박 2일간 나꽈우끼우 마을에 머물면서 마을사람들과 관계하고 우리의 이러한 활동들이 마을에 준 변화들을 살펴보게 된다.
YMCA 치앙마이에서 운영하는 차량을 타고 나꽈우끼우 마을에 도착한 우리. 환영의 의미로 목에 걸어준 꽃다발과 우리를 위해 준비했다는 공연을 보니 오랜 비행과 물을 맞으며 쌓여버린 피로가 순식간에 날아가는 듯하다. 순박한 미소의 마을 주민 외에도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준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아시아 평화도서관이었다.
공부를 하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시작된 공감만세의 아시아 평화 도서관건립 프로젝트. 오랜 프로젝트가 결실을 맞아 드디어 작년 9월 나꽈우끼우 아시아 평화도서관이 개관을 하였다.
도서관은 화려하진 않지만 마을주민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운영중으로 운영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도서관의 전기는 태양열 전기판을 통하여 생산이 되고 있었으며, 지난 2월 이 마을로 공정여행을 온 청소년들에 의하여 그려진 마을지도는 나꽈우끼우 마을이 어떻게 자립형 마을로써 변모해갈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도서관내의 책장에는 태국어, 영어, 한국어로 적혀진 다양한 책이 꽂혀진 채로 어서 자신을 읽어달라며 아우성 치고 있었다. 이 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열심히 학습하여 성장한다면 이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땅을 빼앗기거나 삶의 터전이 무너져 가는 일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의 숙소는 홈스테이다. 보슬보슬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피해 홈스테이 가정에 도착하니 송크란을 보내기 위해 고향집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연신 태국어로 질문세례를 퍼붓는다. 모든 질문에 미소로 답을 하는 나를 보며, 내가 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걸 알아챘는지 이내 질문은 멈추고 얼음이 들어있는 유리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 내민다.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기 힘들어 따라주는 족족 마셔버리는데도 맥주잔만 비어질 뿐 좀처럼 술에 취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홈스테이 집에서 가족들과 기울이던 맥주 몇 잔은 도서관 앞에서 펼쳐진 마을 주민사람들과의 저녁식사와 술자리로 이어져 우리는 밤새 술에 취하기보단 흥겨운 노래 가락에 취해, 따뜻한 정에 취해 늦은 밤까지 잠에 들 줄 몰랐다.
나를 보기 무섭게 ‘요’가 갈길이 바쁘다며 보챈다. 나를 위해 아침밥을 차려준 가족들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잠시 먹는 시늉을 한 뒤 ‘요’와 함께 마을의 사원으로 향했다. 우리가 사원에 갔던 주요 이유는 한국에서 사 온 물품을 건네기 위함이었다. 특히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구충약등은 도시에 비하여 열악한 마을의 보건의료활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준비한 물품을 스님에게 건네고 마을에서 어른들께 했던 비슷한 의식을 마치니, 스님께서 조그만 팔찌들을 건네주셨다. 이 팔찌는 행운의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3일 간 이 팔찌를 왼팔에 낀 채로 몸에서 빼지 않고 있으면 팔찌가 1년간 보호해 준다니, 3일간은 잘 때도 씻을 때도 절대로 빼지 않으리라.
사원에서 나온 우리는 세계에서 제일 큰 우산이 기네스에 등재되어있다는 보상 우산마을과 그 앞의 전통시장에 들렀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마을에서 내려오는 방법으로 직접 우산에 그림들을 그리는 그네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장소를 옮겨 우리도 직접 우산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YMCA 샴캄팽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직접 초빙한 우산 수공예 전문가와 함께 하얀 우산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그림그리기가 서툴기는 하지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우산에 쓱쓱 붓칠을 하니 금새 알록달록한 나비가 가득한 꽃밭이 우산을 빼곡 채웠다.
치앙마이의 심장이라는 핑강에서 태국 전통음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 치앙마이 도심에 위치한 야시장, 나이트 바자르를 찾았다. 이곳은 중국 씨마오와 미얀마의 모울메인을 오가던 원난 지방 상인들이 잠시 들러 장을 열면서 유래한 이후로 기념품을 사려는 외국 관광객이 몰려들며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야시장이 되었다. 관광객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시장은 여행 온 우리의 발걸음이 무엇을 남기게 될지 한번 더 고민하게끔 한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원, 왓프라도이수텝 다음날 아침, YMCA 치앙마이 스텝과 착별인사를 한 뒤 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라는 왓프라도이수텝을 찾았다. 왓은 태국어로 ‘절’이라는 뜻인데, 왓프라도이수텝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800여년 전 란나왕조 때 흰 코끼리가 부처님의 사리를 싣고 이 곳까지 올라와 그 자리에서 울다가 세 바퀴 돌더니 쓰러져 숨을 거두었고, 이를 신의 계시라 여긴 사람들이 탑을 세워 사리를 모셨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전국민 95%이상이 불교신자인 불교국가 태국과 사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태국의 사원을 찾는다면 우선 그 화려함에 먼저 놀라기 마련. 사원마다 그 정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원의 모습들은 한국의 절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풍긴다.
“사원은 관광지가 아니야. 사원은 사원일 뿐이야.”
화려한 사원의 모습에 취해,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내게 태국인 스텝 ‘피페’가 한 마디 한다. 피페의 안내에 따라 꽃과 초를 하나씩 사서 태국인들의 방식대로 기도를 했다. 불상이나 탑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꽃과 기도를 들고 기도를 한 뒤, 기도 후에 초에 불을 붙인 뒤 꽃을 바치면 끝.
당신이 불교신자가 아니라 해도 부디 거부감을 느끼지는 마시기를. 태국인들에게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생활 방식에 가깝다. 실제로 태국인들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도 오래 전부터 믿어온 민간신앙을 버리지 않고 조화롭게 믿어왔기에 태국 전역에서 다양한 귀신들을 모시는 신당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부가 바뀌면 새 내각이 들어서면서 맨 먼저 하는 것도 바로 정부청사 앞에 있는 신당에 예배를 올리는 일이라고. 때문에 불교를 종교 그 자체로써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들의 정치와 사회와 풍습을 통해 복합적으로 발전해온 그들의 문화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태국의 불교를 바라보는 더욱 옳은 시선이라 하겠다.
태국 공정여행을 마치며
우리는 3박 5일 이라는 짧은 시간을 알차기 보내기 위하여 많은 행동들을 했다. 단순히 ‘관광객’이 되기보다는 밤새 마을 주민들과 웃고 떠들며 진짜 ‘가족’이 되었다. 물을 끼얹는 축제의 ‘행동’만을 즐긴 것이 아니라 송크란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기 위하여 노력했다. 우산을 만드는 장인의 솜씨에 ‘감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함께 우산을 만들어 봄으로써 그 어려움을 직접 ‘체험’해보기도 했다.
우리의 3박 5일간의 태국 공정여행은 끝이 났지만, 관광객에 의하여 만들어진 야시장 나이트 바자르를 돌아보며 남았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여행은 과연 이 곳에 무엇을 남기게 될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건 여행객인 우리가 아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곳의 마을 주민들이 답을 내려 줄 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더욱 공정한 방법의 여행을 고민하며 그 다음 여행의 배낭을 싸는 것 뿐.
그렇게 나는 오늘도 더욱 공정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열심히 신발끈을 고쳐 매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