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치앙마이에서 두시간 남짓 달려가면 콕 박혀 있는 나꽈우끼우가 나온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마을 사람들 수십 명이 모여서 하루 종일 마을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그 날 저녁 공감만세는 순박하고 욕심없는 이들이 사는 이 마을에 여행을 온다면 누구든 진정한 태국을 만나고, 말 그대로 힐링하여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공정여행을 통해 살기 좋고, 오고 싶은 나꽈우끼우 마을을 만드는 게 당면 과제가 되어버렸다.
1,000여명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에서 언젠가부터 마을 사람들은 엉뚱한 과정을 통해 땅을 잃기 시작했다. 갑자기 물가가 치솟았을 무렵이다. 생계도 해결해야 하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야 하는 농민들은 땅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았다. 그땐 은행에서 대출을 그렇게 잘해줬다.
그리고 이 집 저 집, 담보 잡힌 집이 은행에 넘어갔다. 대부분 땅은 토호와 외국계 회사 소유로 넘어가고, 생산성만 앞세워 그들의 손에는 농약과 화학비료가 들려졌다. 반딧불이가 점점 사라지고, 아이들 몸에서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무엇을 위해 삶의 터전이 파괴되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히려 갈수록 오지랖이 넓어지는 이상한 할아버지 수리웡양이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평범한 그의 집은 언제나 가득했다. 그런 그를 가족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가족은 그의 오지랖 때문에 희생해야 하는게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던 그가 결정적인 사고를 친다. 마음 맞는 이들과 마을 농민회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농민회는 간단한 논리에서 시작했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돈을 벌면 공평하게 함께 나누자는 것. 얼핏 보면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인데 문제가 있었다.
일단 유기농으로 재배한 제품을 이용할 만큼 태국의 경제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과, 돈을 벌어서 공평하게 나눈다는 의미를 설정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 때 유엔개발계획(UNDP: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에서 태국북부유기농민회(NOSA: The Northern Organic Standard Association)와 함께 북부지역 농민을 돕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비정부기구에서 일하는 아들을 통해 소식을 건네 들은 수리웡야이 씨는 이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빔 프로젝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두 모아 놓고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의 프로젝트는 선정되었다.
유엔개발계획과 태국북부유기농민회는 태국 북부에 드리워진 전반적인 문제를 경계하며 유기농법을 실천한다는 나꽈우끼우 마을 사람들의 의지를 높게 샀다. 다행히 유기농법으로 전환하자 채소는 잘 자랐다. 프로젝트에 포함되었던 농민 대상 교육이 유기농법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다음은 유기농산물이 필요한 곳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람빵 주처엥서 일하던 딸과 이야기하던 중 수리웡야이 씨는 병원 환자들에게 농약에 오염되지 않는 농산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침 유기농산물 공급이 부실했던 병원에 납품이 가능해지고, 그의 딸은 관련 내용을 주청 곳곳에 알렸다. 내용을 접한 주지사는 주청 공터에 유기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마을사람들의 유기농산물은 맛과 품질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돈을 벌게 되면서 수리웡야이 시는 독특한 발상을 또 한가지 했다. 근대화가 되기 이전 마을의 관습처럼, 땅을 개인이 소유하는 게 아니라 마을이 공동 소유하자는 발상이었다. 각자 필요한 만큼 가져가야 하는 돈이 얼마인지 논의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꽈우끼우 마을은 씨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마을 내 빈부격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그만한 생활수준이었다. 여전히 수십 년 상환으로 빚을 내어 아이들을 대학 보내고, 집을 개보수하는 동네가 나꽈우끼우였다. 하지만 땅을 빼앗긴 경험과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더해져 사람들은 욕심을 접은 해 수리웡야이 씨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결국 자그마한 땅부터 그들이 세운 농민 조직 '학남장(Hug Nam Jang the Organic Farmer Group)의 이름으로 소유하기 시작했다. 작은 커뮤니티 센터가 생기고, 제품 개발을 하는 실험 경작지도 만들었다. 특용작물을 통해 화장품을 만들었고, 음식물 쓰레기를 응축하여 메탄가스를 생산해내는 바이오가스 탱크도 보급했다.
어느새 나꽈우끼우는 외부의 변동이나 압력에 구애받지 않는 자립형 농촌 공동체로 변모되고 있었다.
이후 공감만세는 나꽈우끼우 마을에서 공정여행을 시작했다. 영세한 공감만세지만 무리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자립형 농촌 공동체 연구 도서관을 세우고 마을사람들의 회관이자 외부 사람의 연수 기관으로 폐교 시설을 개조하는 일을 도왔다. 살기 좋은 마을은 결국 여행자를 설레게 하는 마을이 된다고 믿었다.
우리는 5년 동안 매일매일 사람들과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꽈우끼우 농촌형 자립공동체를 만드는 중이다. 우여곡절은 여전히 많다. 우리는 계속 도전할 것이다.
우리의 여행이 세상을 바꿀까 중, 고두환, 선율